잠깐 눈을 붙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서히 정신이 돌아왔다. 눈을 떠 보니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승객들이 내는 작은 소음마저 지워버리는 엔진 소리도, 옆에 앉아서 졸고 있는 옆자리 여성분들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고객 만족 중인 승무원들도, 비좁은 좌석과 폐쇄된 환경까지. 잠이 들기 전과 모든 것이 동일했다. 단지 내 아랫배를 콕콕 쑤시는 복통을 빼면 말이다. 난 이 느낌을 익히 알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빈번히 나를 괴롭혀오던 몹쓸 녀석. 급성 장염이다. 흔히 물갈이가 원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대체로 맞는 듯했다. 군대 훈련소에서도 얼마간 고생하지 않았던가. 아무래도 출발하기 전에 먹었던 갈비탕이 원인일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예상해서 내가 장거리 이동을 할 때 되도록 음식을 줄이려고 했던 것이다. 괜스레 그것이 한국에서 먹는 마지막 음식인 양 최후의 만찬을 즐긴 것이 고통으로 돌아온 것이다. 아직 비행기가 착륙하려면 한 시간이나 남아있다. 하지만 난 얼마 버티지 못하겠지. 그 순간 하늘이 도운 것일까? 옆좌석 사람들이 차례로 일어나 기내 화장실을 이용했고 그 틈을 이용해 나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일을 본 후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고비를 무사히 넘겼다고 안심했다. 안타깝게도 고통은 얼마 후 계속되었다.


 화장실을 한 번 더 갈까 말까 고민하는 와중에 기장의 목소리가 스피커로 울려 퍼졌다. 잠시 후 시드니 국제공항에 착륙할 예정이므로 좌석에 앉아 안전 벨트를 착용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어쩔 수 없이 공항에 내리기 전까지 참아보기로 했다. 불편한 속을 달래며 안전 벨트를 조였다. 주섬주섬 짐을 챙기는 것도 일이었다. 그래도 할 수 없다. 버텨야 한다. 두 주먹 꽉 쥐고 힘겨운 싸움을 계속해 나갔다. 비행기가 선회해서 착륙하는 그 시간이 나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졌다. 배 속에서는 용암이 세상을 향해 힘차게 요동치고 돌처럼 단단한 두 주먹은 핏기를 잃어가고 촉촉이 젖은 이마에서 김이 날 때 비행기는 활주로에 가볍게 내려섰다.



 한국에서 약 8,000km의 거리, 10시간의 비행 끝에 지구의 남반구 최대의 도시 시드니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보통 난 이런 상황에서 한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 같은 농담을 떠올렸겠지만, 불행히도 그럴 겨를이 없었다. 내 지상 목표는 단 하나. 화장실이다. 비행기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내 안의 무언가도 빠져나가기를 노력하고 있었다. 승무원의 작별 인사를 듣는 둥 마는 둥 잰걸음으로 게이트를 통과해 드디어 화장실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난 그곳에서 몸을 매우 가볍게 만들었다.


 일을 마치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화장실을 나섰다. 벌써 많은 시간이 흘러있었다. 나와 같이 내린 한국 승객들은 이미 입국심사대를 통과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온통 외국인들의 물결이었다. 아. 드디어 시작이다. 천장에 달린 Arrival 표지판을 따라 이동했다. 입국장에는 끊임없이 많은 사람이 들어오고 있었고 난 입국 신고서와 여권을 들고 인도 사람들 사이에 줄을 섰다. 입국 심사를 하는 공항 직원은 왠지 피곤해 보이는 남자였다. 이제부턴 외국식이다. 당당한 걸음으로 심사대로 다가가 직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인사했다. 그러자 그 직원은 내 여권을 보고 나에게 한국말로 '안녕하세요.' 라고 말해줬다. 역시 시드니로 한국 사람이 많이 오긴 하나보다. 특이 사항이 없으므로 순식간에 절차는 끝나고 '땡큐'라고 감사 인사를 했다. 심사대를 통과한 후 Baggage Claim으로 내 짐을 찾으러 갔다. 대충 위치를 파악하고 아래층으로 계단을 내려가던 중 공항 방송으로 내 이름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아시아나 항공 OZ601 변연우 고객님은 짐을 찾아가라.'라는 한국말이었다. 내가 화장실과 입국심사 줄을 서는데 시간을 많이 쓴 관계로 내 배낭은 케로슬(컨베이어벨트)에서 이미 회전이 끝이나 있었다. 서둘러 그 자리에 가보니 아까 봤던 아시아나항공 승무원이 내 짐을 지키고 있었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있나. 서로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고 배낭을 챙겨 들었다.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그 후로도 세관 신고 및 검역대로 가서 가방에 마약이 있는지 귀엽게 생긴 마약 탐지견이 한차례 검사를 하고 입국을 완료할 수 있었다. 마지막 문을 통과하면 다시 공항 안으로 돌아올 수 없다. 이제 온전히 호주땅이다. 그렇게 여행지에 첫발을 내디뎠다.




 호주 도착 직후 가장 먼저 해결 해야하는 메인 퀘스트는 바로 휴대폰 개통이다. 다행히도 통신사 부스를 찾아 돌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입국장의 출구를 나오니 곧바로 호주의 통신회사인 옵투스와 보다폰 부스가 보였다. 두 회사 모두 비슷한 선불폰 서비스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쪽으로 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옵투스 쪽에 한국 사람들이 보였기 때문에 나도 스리슬쩍 옵투스 부스로 이동했다. 잠시 후 멋쟁이 남자직원의 친절한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Prepaid 요금을 원한다고 말하니 여러 가격대의 상품을 소개받았다. 난 내비게이션 등으로 아이폰을 사용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4G의 제일 비싼 100달러 정액 요금 상품을 선택했다. 28일간 쓸 수 있고 데이터 5기가에 국제전화 900분 페이스북, 트위터 등 SNS 무제한의 훌륭한 요금제다. 나노유심카드는 공짜였다. 생각보다 내 입에서 영어가 쉽게 나와 나도 놀랐다. 이것은 전수관에서 같이 운동하는 미국인 그렉 덕분이다. 개통절차는 직원이 직접 해줬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 없었다. 개통이 완료되어 바이바이를 한 후 제일 먼저 집으로 전화를 걸어 무사함을 알렸다. 퀘스트 완료다.



 이제 신나게 공항 밖으로 나가보려 했으니 다시금 배에서 신호가 와서 또 다시 화장실로 들어가야 했다. 아무래도 뱃속의 모든것을 쏟아 버리지 않으면 안될 상황인 듯 했다. 장염에 좋은 약을 한국에서 가져왔기 때문에 다행이었다. 그정도는 이미 예측가능한 범위였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았다. 문제는 다른것에 있었다. 위 사진의 상점들을 지나 공항 밖으로 나왔다.







 유리문 밖으로 나와 호주의 공기를 한껏 들이켰다. 막 소나기가 내렸는지 온통 축축하고 미지근한 공기가 느껴졌다. 이제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이동해야 했다. 아이폰의 구글 맵을 열고 길 찾기를 한 결과 복잡한 길을 알려줬다. 난 구글을 믿었기 때문에 표기를 따라 계속 이동을 했다. 국내선 터미널로 이동하는 길이 표시되었지만, 이상하게도 국내선으로 가지도 못하고 지하철도 나오지 않았다. 자꾸만 외부 주차장으로 도착했다. 그렇게 난 30분째 공항 입구 근처를 맴돌고 있었다. 다리도 아프고 어깨도 아팠다. 다시 내가 밖으로 나왔던 유리문으로 돌아와 벤치에 앉아 숨을 돌렸다. 그리고 한국의 친구들에게 SOS도 보내고 인터넷으로 빠져나오는 법을 검색도 해보는 노력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다. 결국, 원인을 알아냈다. 그랬다. 지하철은 지하에 있었다. 지하의 길을 지상으로 다니고 있으니 죽어도 길이 안 나오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난 아까 그 상점 통로를 지나서 지하로 내려갔어야 했다. 해외여행에서 이 정도의 시행착오는 귀여운 축일 것이다.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 마치 이제 막 도착한 듯 행동을 하며 당황하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철로 이동했다. 시작부터 길을 잃다니……. 이거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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