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기 있게 회사를 그만둘 결정을 하는 데까지는 좋았지만, 인생은 언제나 계획대로 되지는 않는 법이었다. 생각보다 퇴직은 빨리 다가왔다. 내가 호주로 워킹을 가고 싶다고 말한 지 일주일 만에 괘씸죄로 잘려버렸다. 모든 것이 엉성한 회사. 사장의 말이 곧 법이었다. 그래, 고용계약서도 써본 적 없이 다닌 벤처 기업 더는 미련 없다. 어떤 직원은 나보고 '사장님께 가서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빌어라.' 그런 말까지 했다. 내가 뭘 그리 잘못을 했을까? 난 그냥 그동안 내가 일한 정당한 대가를 받고 일을 했으며 더는 내 일이 발전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만두는 것이다. 어차피 전공과 비슷한 일도 아니었다. 회사에서 내가 하는 일은 대졸자가 아니라 고등학생이 해도 충분한 그런 일이었다. 자존심 버려가며 몇 개월 더 일하는 것보다는 내 자존감이 나에게 더 소중했다. 기왕 일찍 그만두는 김에 그동안 하고 싶었던 것을 실컷 해보자고 생각했다.
겨우내 몸을 움츠리게 만들었던 찬 바람이 물러가고, 따스한 햇볕과 상쾌한 풀 내음이 기분을 좋게 만드는 봄의 어느 날 나는 짐을 챙겨 집으로 내려왔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이제 남은 시간, 온전히 나를 위해 사용할 수 있다. 나는 평일에도 만족할 만큼 늘어지게 잘 수도 있었고 그렇게 하고 싶었던 택견도 다시 시작했다. 불어난 몸무게로 인해서 움직임이 예전과 같지는 않지만, 비 오듯 쏟아지는 땀 한 방울 한 방울은 결코 내 노력을 배신하지 않는다. 빠르진 않지만 조금씩 예전의 실력이 돌아오고 있었다. 지난 일 년간 세워둔 내 자전거도 다시 타고 싶었다. 고장 난 안장도 고치고 타이어의 튜브도 교체했다. 매일 매일 전수관과 집을 오가는 데 사용했다. 내리막길에서 중력을 받아 속도를 올리면 공기의 저항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하늘을 나는 기분이다. 나를 스쳐 지나가는 공기의 흐름에 그동안 받았던 스트레스도 같이 흘려보냈다.
호주 워킹 홀리데이에 대해서 여러 가지 검색을 하면서 알아보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예전만 못하다고 말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워킹중인 한국 사람들이 폭행이나 강도를 당하거나 배우고 싶은 영어 실력은 늘지 않고 사는 데 급급해 노예처럼 일만 하다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노예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일을 그만두었는데 그곳에 가서 또다시 노예생활을 할 수는 없었다. 그야말로 글로벌 호구 아닌가. 워킹 홀리데이 생각을 접고 여행을 가야겠다고 계획을 수정했다. 그러다보니 일찍 출발할 필요가 없어져 버렸다. 나는 당분간 평소의 생활에 충실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시간은 정말 빨리 흘러갔다. 그동안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한 고등학교 택견 동아리 활동에 조교로 참여하여 지방 방송에도 잠깐 나올 수 있었다. 무더운 여름날 농구를 하다가 전방십자인대 파열의 부상을 당한 형의 간호를 위해 강원대학병원에서 일주일 넘게 생활도 해봤다. 시원한 에어컨 때문에 감기에 걸릴 지경이었다. 덕분에 올여름 우리가족 피서는 물 건너 갔다. 서점에서 읽고 싶은 책도 마구마구 사버렸다. 개인적으로 두꺼운 책을 좋아해서 내 책장의 공간은 갈수록 줄어만 갔다. 아쉽게도 독서보다는 다른 것에 집중하다 보니 사버린 책의 양에 비해서 읽은 책은 얼마 되지 않는다. 지금도 열심히 읽고 있는 중이다. 지겨웠던 여름 장마도 지나고 슬며시 다가온 가을도 깊어만 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10월이 되어 있었다. 신선놀음에 빠져 있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6개월 정도는 정말 순식간이었다. 이대로 올해를 다 보낼 판이었다. 이대로 출발하지 못할까 걱정이 되었다. 이제 어디 가서 맞아 죽지 않을 정도로 체력과 전투력도 올렸다. 이제 정말 출발해야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일단 기존에 있던 구형여권을 전자여권으로 갱신했다. 전자여권이 여러모로 편리하단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군 전역 후 해외여행에 가보려고 만든 구형 전자여권은 한 번도 사용해보지 못하고 그렇게 불쌍하게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여권을 만들었으니 호주 이민성 홈페이지에 들어가 전자비자를 신청했다. 돈만 내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편리했다. 전자여권의 위력이 이런 곳에서 나왔다. 비자까지 발급받고 나서야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로 여행을 떠나는구나.
비행기 표를 급하게 알아보기 시작했다. 사실 비행기 표는 일찍 예약할수록 가격이 좋기 때문에 알뜰하게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들은 수개월 앞서서 예약을 한다. 나처럼 몇 주를 앞두고 임박해서 구입을 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고 결국 표를 구한다 해도 가격은 상당히 올라기 마련이다. 호주에 가본 적 있는 사촌 동생이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도움을 주었다. 인터파크에 있는 직항 왕복항공편을 알아보고 약 120만원 정도에 표를 구입할 수 있었다.
출발 일자는 2013년 11월 22일 도착 일자는 12월 23일로 정했다. 크리스마스는 한국에서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시드니의 여름 크리스마스는 정말로 큰 축제라고 했다. 뒤늦게 호주에서 그것을 알고 출국 비행기를 늦추려 했으나 자리가 없어서 불가능했다. 훗날 이 일은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인 숙소를 찾는 일은 친구의 도움이 컸다. 여행을 좋아하는 꽁양의 노하우는 거의 내 구세주나 마찬가지였다. hostels.com의 홈페이지를 이용하여 시드니 버우드 지역의 Sydney Student Living이라 하는 여행자 숙소를 정했다. 23일 체크인 28일 체크아웃. 하루에 약 6만원이고 2인실을 혼자 예약했다. 약간 비싼 감이 있지만 원래 여행은 약간 럭셔리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았다.
시드니에 대해서는 정말 오페라 하우스밖에 몰랐던 난 서점으로 달려가 호주여행 책자를 여러 권 샀다. 그리고 안 읽었다. 앞서 설명한 바 있는 내 불안증에 도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계획만 세워서는 실천할 수 없으니 일단 적당히 저지르고 지켜봐야,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혼돈의 이 세상에 계획대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이미 수개월 전에 체험했기 때문이다. 책자는 호주에 도착하고 나서 이용할 것이다.
만약 테마를 정해야 한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무계획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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