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편안한 잠자리를 통해 몸과 더불어 영혼의 휴식을 얻을 수 있었던 내 방, 내 침대가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평소의 나는 잠자리에 굉장히 예민하다. 내방 한켠에 걸린 시계의 똑딱거리는 소리에 쉽사리 잠이 들지 못하다가, 시계의 건전지를 빼 버리고서야 비로소 잠이 들 수 있던 적도 있었다. 참고로 그 시계는 5년째 멈춰있다.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베개를 언급하자면, 그것의 푹신함과 높이가 다음날 목의 편안함을 좌우한다고 생각하고 있기도 하다. 이곳에 와서 처음 만난 베개는 내 기준점 보다 조금 높았다. 머리를 뉘였을때 목이 앞으로 꺾인 듯한 기분이다. 이래선 숙면이 힘들지도 몰랐다. 그래도 이불은 만족할 만큼 적당히 무거웠다. 난 내 몸을 지그시 눌러주는 이불에서 잠이 더 잘 오기 때문이다. 침대의 스프링 탄성이 조금 부족해 살짝 불만이었지만, 몸이 피곤했기 때문에 잠들기에는 그럭저럭 합격점을 내렸다. 또 합격이 아니면 어떤가. 방바닥에서 잘 수는 없지 않은가. 이곳 방바닥은 카펫이 빼곡히 깔렸지만, 신발 벗는 현관이 없었다. 마치 맨땅, 복도같다. 서양식으로 그냥 신발을 신고 돌아다니는 문화였지만 난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그저 방문 가까이 신발을 벗어놓고 맨발로 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이동하고 이래저래 적응하느라 심력을 소모했던 모양인지, 침대에 눕자마자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숙소는 도시에서 변두리에 위치한 마을이라 자동차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조용한 아침. 평소 나의 수면에 대한 지론에 의하면, 조용함은 수면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잠이 들기에는 최적의 환경이었던지 둘째 날 아침 기상은 성공적이었다. 오히려 창의 블라인드가 빛을 막아주었기 때문에 아침이 온 줄도 모르고 계속 잠이 들어있다가 9시가 넘어서야 깨어날 수 있었다. 기분 좋은 새의 지저귐에 잠에서 깨어 살며시 눈을 뜨자, 침대 왼쪽의 블라인드로 가려진 창틈으로 빛이 새어 들어와 방을 은은히 밝히고 있었다. 그 빛에서 약간의 따스함 마저 느껴졌다.


 아직도 남아있는 수면의 기운을 떨쳐 버리기 위해 텔레비전을 틀었다. 아침의 시작은 텔레비로부터……. 그것은 오랜 기간 되풀이되어 온 조건반사적인 진리다. 아마도 군 시절부터 그랬던 것이 아닐까 싶다. 뭐라뭐라 무슨 소리를 떠드는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영어의 빠른 적응을 위해서 뉴스를 틀어 놓고 그냥 계속 들었다. 아직도 속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식사 대신 과자와 음료수로 칼로리를 보충하며 오늘 할 일을 생각해 봤다. 시드니에 온 이상 호주의 랜드마크, 오페라 하우스부터 방문하는 것이 인지상정. 하늘을 향해 배를 세워놓은 듯한 그 건물의 아름다움은 세계인들의 마음속에 호주를 깊이 새겨 주었다. 만약 시드니에서 머물고 있다면, 전 세계의 사람들이 호주의 상징처럼 생각하고 있는 그 아름다운 건물을 직접 찾아가서 눈으로 보고 만져보고 맛보고 때려봐야 하는 건 누군가 말하지 않아도 당연한 일이라 생각한다.


 서둘러서 샤워한 후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더운 날씨를 고려한 반소매 티. 그리고 강렬한 태양 빛을 막기 위한 필수품 선크림을 골고루 발랐다. 손가방에 가이드 북과 지갑을 챙겨 넣은 후 외출 준비를 완료하니 어느새 12시가 되어 있었다. 들뜬 기분으로 숙소를 나왔더니 파란 하늘과 상쾌한 공기가 나를 반기고 있었다.



 어제부터 꼭 들르고 싶었던 곳이 있다. 숙소를 나와 역까지 가는 도중 반드시 만날 수밖에 없는 버우드 공원이다. 호주에 와서 놀랐던 점은 이렇게 관리가 잘 된 공원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처럼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세요.' 따위의 글귀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잔디가 너무 잘 자라서 자주 다듬어줘야 할 판이다. 잘 관리가 된 잔디와 이국적인 나무의 모습이 먼저 눈에 띄었고, 쓰레기는 찾아볼 수 없는 청결함에 또다시 놀랐다. 도시 곳곳에 있는 공원은 호주의 청정 자연환경을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공원 입구에서 볼 수 있는 경고 문구는 이곳은 CCTV에 의해 감시되고 있고 술을 먹지 마라. 뭐 이런 뜻으로 보인다.




 깔끔한 인도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다 보니 공자상을 만날 수 있었다. 중국인들이 많은 지역답게 중국의 위대한 철학자의 동상을 세워 놓았다.



 분수대가 설치된 연못 주위에는 여러 새가 날아와 쉬고 있었다. 이곳 호주에서 갈매기는 서울의 닭둘기 급으로 존재하고 있다. 물론 바닷가에 위치한 항구도시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봐도 도망가지 않는다. 이곳의 주인은 자신들인 듯 아주 자연스럽다.



 저 게이트 너머로 크리스마스 트리가 보인다. 말로만 듣던 여름의 크리스마스. 축제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사진 속의 저 푸른 하늘이 보이는가? 이곳의 하늘색은 저렇다. 황사에 찌든 한국의 뿌연 하늘이 아니라 정말 푸른 하늘이다. 한국에서도 비가 온 뒤 겨우 만나볼 수 있는 그 푸름이 이곳에서는 일상이다. 덕분에 따가운 햇볕이 당신의 피부건강을 위협하는 무서운 곳이다. 눈이 부셔 안구에 습기가 찰 때쯤, 한국에서 선글라스를 사오지 못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살짝 아쉬웠지만, 이 눈부심 또한 여행지에서 만나볼 수 있는 귀중한 경험이다 생각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흔히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의식주'다. 옷은 외부의 환경으로부터 몸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고, 음식은 생명유지에 필수적이다. 그리고 마지막 요소인 집이 주는 효과는 심리적, 신체적인 안전을 제공해주기 때문에 몸의 긴장을 풀고 피로를 해소할 수 있게 해 준다. 예로부터 외부의 적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외부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답답함을 주지 않는 편안한 집은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받아 왔다. 고대의 왕족은 말할 것도 없고 현대의 부자들 또한 높은 담을 쌓고 경비원을 두어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여념이 없다. 그만큼 안전하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집은 삶에 있어서 중요하다 말할 수 있다.


 여행지에서도 그 개념은 동일하게 적용이 된다. 바퀴벌레가 기어 다니고 외풍이 잦은 방에서 잠을 잔다고 상상을 해보자. 과연 안심하고 쉴 수 있을까? 자칫 하다간 모든 여행 일정을 망치게 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따지면 시드니에서 제일 처음 묵었던 이 숙소는 모든 여행 기간 중 최고의 숙소로 평가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버우드 지역이면 중국계 이주민이 많이 살고 치안이 약간 불안하기로 알려졌지만, 오히려 도심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서 유흥가도 없고 저녁만 되면 거리는 한산하기만 했다. 또한, 주변이 주택 지역이라 평소에도 조용함이 계속되는 그야말로 편안히 쉬기 적당한 지역이라 할 수 있었다. 여행지에서 편안한 휴식과 잠자리를 원한다면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싸고 질 좋은 숙소는 찾기 힘들지만 적당한 가격에 질 좋은 숙소는 많다. 가격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좋은 경험 하러 멀리까지 여행 와서 돈 몇 푼 아껴보겠다고 싼 숙소를 잡았다가 더 큰 희생을 치를 수 있으므로 잘 선택해야 한다.



 내가 처음 시드니에서 만나본 이 숙소를 처음 도착했을 때 그러했다. 가정집들 사이에 위치한 이 숙소는 처음 봤을때 과연 여기가 숙박시설이 맞을까 잠시 머뭇거렸다. 마당은 잔디밭이 깔려 있었고 건물 외관은 마치 무슨 정부 사무실을 보는 듯 했다. 깔끔한 2층 구조로 되어있는 그 건물 현관은 자동으로 잠기기 때문에 전자키가 있어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현관에 들어서자 바로 보이는 안내 데스크 옆쪽 복도의 유리창 밖으로 수영장이 있어서 투숙객들이 자유로이 수영을 즐길고 있었다. 건물이 도넛츠 구조처럼 생겼기 때문에 수영장에서 외부의 시선은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 옆에는 바비큐 파티를 할 수 있는 도구도 준비되어 있었다.


 안내 데스크로 가서 예약을 했다고 말하고 신원 확인을 한 뒤 체크인을 했다. 곧이어 책임자로 보이는 인상 좋아보이는 아저씨가 마이프렌 하면서 친절하게 직접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시설이용에 관해 설명해 줬다. 원형 복도 중심으로 주방이나 거실같은 공용시설이 있었으며 지하실에는 세탁실과 헬스장이 있었다. 이층에는 발코니가 있어서 바람을 쐬며 책을 읽거나 동료들과 맥주를 마시며 놀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나는 혼자서 여행했기 때문에 자주 이용하지는 못했지만 만약 기회가 된다면 다음번에는 동료들과 같이 와서 즐기는 것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객실은 보통 2인실이 기본으로 되어 있다. 혼자 지내고 싶으면 2인의 비용을 내고 혼자서 2인실을 사용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더블과 트윈의 선택사항이 있는데 더블은 커다란 침대가 하나이고 트윈은 침대 두 개가 있다는 뜻이 된다. 내가 선택한 방은 트윈룸이었기 때문에 침대 두 개가 있었다. 그리고 침대 하나 크기가 혼자 누워도 남을 정도로 컸다. 침대에 들어가 팔다리를 쭉 뻗어도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이불 역시 묵직해서 참으로 내 취향이라 할 수 있었다. 침대 옆에는 간단한 싱크대와 전자레인지, 작은 냉장고가 있었고 화장실 또한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이 화장실은 2인실의 특권이기도 했다. 다인실을 이용하는 경우 화장실과 샤워룸은 객실 외부 공동공간에 있었다. 이런 건 방 안에 있는 것이 훨씬 편하다. 책상에는 와이파이 사용방법과 암호 그리고 숙박 규정 등이 적혀있는 안내서가 코딩되어 있었다.


 솔직히 임박해서 아무 숙소나 예약을 잡은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퀄리티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대박이 아닐까? 다시금 이런 숙소를 골라준 꽁양에게 감사 인사를 드린다. 어쨌든 첫 번째 퀘스트는 이렇게 성공적으로 완료했다. 호주 여행이 첫 시작은 공항에서 빼고는 시작이 좋다고 생각되어 기분이 좋았다. 방에서 머물기 위해 일단 차곡차곡 짐을 풀었다. 옷들은 잘 정돈해서 옷장에 넣어두고 책상에는 앞으로 여행계획을 위한 여러 가지 책을 빼서 정렬했다. 짐 정리가 끝나자 일단 티비를 틀고 침대에 누워 잠시 쉬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긴장했을 심신을 달래는 중요한 의식이기도 했다. 리모컨을 들어 티비를 틀어보니 대략 열가지 정도의 채널이 나오고 있었다. 더 많은 채널을 원하면 거실의 큰 티비를 이용하라는 직원의 말이 떠올랐지만, 어차피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거 무슨 상관일까. 그냥 대충 뉴스 채널에 고정했다. 곧이어 호주 특유의 억양이 들리기 시작했다.


 침대에 누워서 필요한 것들을 생각해 봤다. 일단 당장 오늘 먹을 음식이 필요했고 여행자용 전원 어댑터가 필요했다. 호주의 콘센트는 한국과 달라 구멍이 3개로 되어 있고 240v를 사용했다. 전자기기를 충전하기 위해서는 꼭 어댑터가 있어야 했다. 오다가 들린 작은 구멍가게에서는 없었기 때문에 큰 마트에 가보기로 했다. 구글 맵으로 호주에서 잘나가는 대형마트 울월스(Woolworths)를 검색해보니 아까 지나온 버우드 역에서 잠깐만 가면 되었다. 생각이 난 김에 거리 구경도 할 겸 방을 나섰다. 방을 나설 때 주의할 점은 전자 카드키를 꼭 잃어버리지 말고 가져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밖에서 문을 열 수 없으니 항상 몸에 지니는 것이 바람직한 자세다.



 밖으로 나서니 구름이 개어 맑은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주의 날씨는 변덕스럽다고 누군가 그러던가? 눈 부신 햇살이 피부에 닿으니 역시 여름의 열기가 느껴졌다. 내 잃어버린 여름휴가를 고향에서 8,000km 떨어진 이곳에서 찾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절로 노래가 흥얼거렸다.



 아까 걸어왔던 길을 반대로 걸어가다 만난 노란색 건물이다. 과연 저 건물은 뭘 하는 곳인가? 잠시 검색을 해봤더니 약국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건강보조제 대형할인매장 정도라 칠 수 있다. 건강 보조제의 천국이라 불리는 호주는 정말 각양각색의 제품들이 팔리고 있었다. 난 보조제에 관심이 없다 보니 들어가 보진 않았지만, 내부에는 약통들이 빼곡히 진열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건강에 관심이 많은 호주답게 티비 광고의 상당 부분을 운동 보조기구가 차지하고 있었다. 근육 불끈, 몸매 좋은 남녀들이 육체미를 뽐내며 상품을 이용하고 있는 모습은 광고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렇게 건강에 신경 쓰는 호주인들의 평균수명은 어떻게 될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열심히 걷고 또 걸어 울월스에 도착을 했다. 과연 대형마트답게 각종 제품을 팔고 있었다. 전체적인 모습은 한국의 마트들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에 편하게 둘러볼 수 있었다. 과연 무슨 제품이 있을까 구경하던 난 아시안 푸드 코너에 익숙한 것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한국사람이라면 다 좋아한다는 푸라면과 새우깡, 양파링이다. 한국사람이 많은 시드니답게 한국 음식도 당당히 한 편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고향의 그리움이 느껴질 때 하나씩 먹으면 정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일단 오늘 먹을 간단한 식량을 먼저 골랐다.



 내 장염은 물이 문제인 듯하니 좋은 물을 고르고 익숙한 과자와 라면을 골렸다. 속을 달래는 데는 익숙한 것이 최고다. 마트를 한 바퀴 도는데 십여 분이 지났던 것 같다. 대충 어느 위치에 뭐가 있는지 알았기 때문에 쇼핑 처음의 목적은 달성했다. 이곳 마트의 위치는 역과 가까우므로 어디 놀러 나갔다가 와서 잠시 들렀가 숙소로 돌아가는 코스가 머리에 그려졌다. 훌륭한 위치선정이다.



 계산대에는 유인 계산대와 무인 계산대가 있었다. 기계에 호기심이 많은 나는 자연히 무인 계산대로 가서 계산을 해봤다. 간단한 절차만 따르면 손쉽게 계산을 마칠 수 있었고 옆에서는 직원이 항상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르는 상황이 생기면 도움을 요청해도 문제없다. 이 건물은 마트뿐만 아니라 사진관, 통신사 매장, 의류 매장, 신발 가게 등도 다 같이 있는 작은 쇼핑몰과 같았다. 대부분 것들은 이곳에서 구할 수 있으니 손님이 끊이지 않고 모여들었다. 볼거리도 경험할 거리도 많지만, 일단 내일 일정 계획을 위해 얼른 숙소로 돌아왔다.


01


내일 어디를 갈지 정하느라 책상이 온통 어질러 졌다. 배고프면 옆에 있는 과자를 먹고 냉장고에 음료수를 꺼내 마시며 계획에 몰두했다. 시드니는 작은 도시지만, 구경할 것들이 많이 있어서, 책으로 보며 내일 직접 찾아갈 생각을 하니 저절로 즐거워졌다. 이리저리 구상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졌다. 피곤하기도 하고 시차 역시 한국보다 약간 빨랐기 때문에 일찍 졸음이 몰려왔다. 공용 거실에서는 파티가 열리는 듯 시끄러웠지만 난 내일을 위해 꿈나라로 떠나기로 했다. 푹신한 침대가 편하기 그지없었다.


 참 신기했다. 어제까지는 겨울인 한국에 있던 내가 오늘 이렇게 여름 날씨의 호주에 있다는 것이 말이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하늘과 한국의 친구들이 보고 있는 하늘이 다를 것이라 생각하니 그 어마어마한 거리감이 내게 다가왔다. 몸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언제든지 소식을 전하고 받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가만히 오늘 있었던 일을 되새기며 잠이 들었다. 그렇게 호주에서의 첫날이 마무리되었다.

 촉촉하고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거리를 걷는 기분은 정말 좋았다. 거리 풍경을 감상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트레인 역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구역답게 여러 마트와 중국 음식점, 패스트푸드점 그리고 식료품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뭔가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이 있었지만 지금 당장은 그림의 떡이다. 지금 먹으면 아마도 내 위장이 버텨내지를 못하리라. 순간의 고통을 참으면 훗날 더욱 빠른 회복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다시금 되새겼다. 좀 더 앞으로 나아가자 유럽의 오래된 관광지에서만 볼 수 있다고 생각한 고풍스러운 건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호주에서 처음보는 이 오래된 교회는 정말 고풍스러워 보였다. 왠지 변색된 벽돌 하나하나에 세월이 묻어났다. 정교하게 조각된 곡선의 돌조각과 거칠게 마감된 외벽이 기묘한 조화를 이루어 건물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이 되어 있었다. 낮은 건물들 일색인 도로변 사이에 높아 솟아오른 첨탑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볼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건물이 존재한다는 것 만으로도 이 거리가 얼마나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는지 추측할 수 있다. 교회건물을 잠시 구경한 후에 두 블럭 정도 더 걷다보니 잘 정돈된 공원이 보였다.





 호주의 대표적인 쉼터인 이 공원들은 어디를 가든 흔히 만날 수 있다. 정부에서 직접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깔끔하고 청결한 이 공원들은 이곳을 찾는 시민들이 안심하고 편하게 쉬다가 갈 수 있는 멋진 곳이다. 도시생활에 지친 사람들이 풀 내음을 맡으며 낮잠을 즐기곤 한다. 나는 열심히 도시의 길을 걷다가 갑자기 녹색으로 무장한 잔디와 높이 솟은 나무들을 만나니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흙은 찾아볼 수 없는 도시에서 갑자기 멀리 떨어진 아마존의 대자연 숲으로 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쉴새 없이 즐거운 새소리가 들려오는 그 공원을 보고 다시 한 번 호주가 청정지역임을 떠올릴 수 있었다. 비록 지금은 숙소에 가는 길이 바빠 그냥 지나가지만 나오면서 꼭 한번 들려보고 가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어느새 구름은 걷히고 있었고 시리도록 파란 하늘이 구름 사이로 보이기 시작했다.


012


 호주의 도로를 잠시 살펴보면 자동차의 움직임이 우리나라와 반대인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호주는 영국의 이주민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대부분 것들이 영국식을 따르고 있다. 도로의 흐름이 반대라는 사실은 처음에는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보통 우리나라 사람들은 길을 건널 때 왼쪽에서 차가 오는지 안 오는지 무의식적으로 확인하고 건너지 않는가. 하지만 그 방법을 이곳에서 써먹다간 크게 곤란한 상황을 맞이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오른쪽으로 확인해야 한다. 건너편으로 건너가기 위해 횡단보도를 찾다가 그 횡단보도가 그냥 단순히 하얀 줄 두 개로 그어져 있다는 것에 첫 번째로 놀랐고 그 밑에 친절하게 오른쪽을 바라보라고 표시된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라게 되었다. 만약 그 표시를 보지 못했으면 난 무의식적으로 왼쪽을 확인하고 건넜을 것이다. 누구의 생각인지 참 고마웠다. 그 후 난 적응될 때 까지 LOOK  표시를 보면 열심히 따랐다.

 인터넷으로 여행기들을 살펴보다 보니 국제선 터미널에서 시드니의 트레인을 타러 가는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천장 부근의 표시를 따라가라. 간결하고 깔끔한 지시였다. 사실 제일 처음 발을 옮길 때 천장의 표시를 따라 움직이긴 했다. 하지만 왜인지 건물 밖으로 나가게 되고 30분 동안 큰 원을 그리면서 주차장 주변을 맴돌았던 것이다. 아마도 외국이라는 긴장감에 시야가 좁아져 방향을 잃은 것이 분명했다. 일단 진정하고 한숨을 돌릴 필요가 있었다. 건물 외부의 그늘진 벤치에 앉아 가만히 시간을 보냈다. 시드니의 날씨는 초여름 날씨다. 하늘에 구름이 낮게 깔려 다시 한 번 비가 내릴지도 모른다는 확신을 들게 했다. 비 덕분에 여름치곤 약간 시원했다. 내 복장은 비행기 안에서 미리 정리했기 때문에 반소매의 시원한 차림이었지만 무거운 배낭을 지고 돌아다녀 등이 땀에 젖어 있었다. 일단 땀이 다 식을 때까지 휴식 시간을 갖기로 했다. 옆자리에선 양복을 입은 일본인 두 명이 담배를 태우며 잡담을 나눴다. 지금까지 살면서 일본인을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왜인지 친근하게 느껴졌다. 온통 백인들 사회 속의 동양인이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이곳으로 오면서 일본 상공을 구경해서일까? 모를 일이다.


 충분히 휴식을 취한 후 심기일전하여 여유를 갖고 움직이기로 했다. 나는 지금까지 시간을 버린 것이 아니라 공항 구석구석을 구경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인도에서 벗어나 차도로도 걸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다른 구경거리 또한 자세히 볼 수 있지 않았겠는가? 아마도 배낭 여행객 중에 시드니 국제공항 터미널의 유료주차장을 구경한 사람은 내가 유일하지 않을까? 스스로 칭찬을 해 본다. 마음이 여유로워지니 시야가 넓어져 내가 가야 할 길이 자연스럽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간단한 것이 어찌하여 그토록 보이지 않았는지 웃음만 나온다. 공항 터미널 건물 내부의 오른쪽 복도 끝으로 가니 터미널로 향하는 길이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방법과 그냥 바로 엘리베이터로 내려가는 방법 두 가지가 존재했다. 안내 데스크에서 트레인 맵을 하나 빼 들고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이 트레인 맵이 상당히 유용한 아이템이다. 급행과 갈아타는 곳 등이 그림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에 직관적이고 시설 이용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01


 지하로 내려가면 우리나라 지하철과 그다니 다르지 않은 모습이 보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시원하고 널찍한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벽의 화면에는 무슨 전동차가 언제 도착하는지 알려주고 자동 티켓 판매기도 있었다. 그 반대편에는 매표소도 있기에 티켓 구입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그곳에서 물어보면서 티켓을 살 수도 있었다. 난 공대생의 호기심에 자동판매기에 도전하기로 했다. 이 당시에는 사진을 찍지 못했기 때문에 훗날 찍은 사진을 미리 올려보면 이렇다.



 거의 공통적인 화면이다. 터치 패널로 되어있으며 화면 구성이 간단했다. 왼쪽에서는 티켓의 종류를 누르고 가고 싶은 장소를 선택한다. 그리고 탑승객의 종류를 선택하면 지불 방법에 대해 물어보는데 난 시범 삼아 체크카드로 결제를 해봤다. 다행히도 성공이었다. 은행에서 제대로 처리를 해준 듯했다. 메인 퀘스트 사이에 있는 달성 조건이랄까? 한고비를 넘겨 자연스럽게 미소가 지어졌다.



 이렇게 생긴 빨간색 티켓이 나오면 성공이다. 한국은 먼 구간을 갈수록 요금이 조금씩 추가가 되지만 시드니는 도심 근처에 위치한 공항이 제일 비싼 구조였다. 공항 정거장을 이용하면 그보다 먼 거리보다 요금이 많이 계산된다. 이후로도 계속 시내를 돌아다닐 때 계획 없이 편도 티켓을 뽑아 다녔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냥 7일짜리 레일 패스를 뽑아서 다니는 게 더 경제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하철의 이용방법은 한국과 다르지 않다. 저 티켓을 개찰구에 넣어서 통과하면 끝이다. 일단 내가 가야 할 곳은 Burwood의 숙소다. 공항에서 버우드로 가려면 Central 역까지 간 후 환승을 해야 한다. 도심 방향으로 가는 플랫폼에 내려가 잠시 의자에 앉아 전동차를 기다렸다. 이미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승객들이 없어 플랫폼은 한산했다. 잠시간의 기다림 끝에 나타난 전동차는 놀랍게도 2층으로 되어 있었다. 인터넷에서는 시드니 전동차 낡고 부실하다고 리뷰가 되어 있었는데 그새 신형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현대적이고 세련된 차체의 모습은 마치 놀이기구를 타는 듯한 즐거움을 주었다.





 파란색 좌석은 재미있게도 등받이 부분을 밀어서 방향을 조절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지하철보다는 기차와 같은 느낌을 주는 전동차다. 그리고 처음에는 지하철인 줄 알고 있었지만, 구간 대부분은 지상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Train이라고 불렸다. 시드니는 서울에 비하면 도시가 그리 크지 않고 인구대비 땅도 넓어서 그런지 지하로 노선을 팔 이유가 없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좌석에 앉아 창밖을 쳐다보니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곧이어 정신없이 노선도를 보고 가는 길을 분석을 했다. 센트럴 역에서 빨간색 노선을 타면 버우드로 금방 도착이 가능해 보였다. 전동차는 국내선 터미널을 지나 두 정거장을 더 간 후에 센트럴 역에 도착했다. 과연 수많은 노선이 모이는 구간답게 규모도 크고 플랫폼도 많았다. 빨간색 Northern Line 플랫폼을 찾아가는데 처음에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구조를 파악한 다음에는 어디든 못 갈 곳이 없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열차는 금방 도착했고 곧이어 난 내 목적지인 버우드로 가는 전동차에 올라탔다. 이제 숙소까지 불과 두정거장이다. 좌석에 앉아서 머릿속으로 여행자 숙소의 체크인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던 중에 어디선가 한국말로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주위를 살펴보니 젊은 여성분이 한국어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과연 시드니. 한국사람이 많기로 소문난 곳답다. 아마 동양인으로 보이는 사람 중 절반이 한국사람일 것이다. 물론 나머지는 중국사람이겠지. 중국 사람은 정말 어디를 가든 있었다. 후에 들었지만 버우드 바로 옆의 Strathfield에 코리아 타운이 있다고 했다. 바로 옆이라 그런지 한번도 가보진 못했지만 버우드라고 한국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버우드역에서 내려 역사 밖으로 나왔다. 내 눈앞에 펼쳐진 거리의 모습이 이랬다. 낮고 각자 개성이 있는 건물 깔끔한 도로, 흙이란 존재하지 않는 정갈한 보도블록,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쓰레기 더미 따윈 존재하지 않는 청결함에 놀라 웠다.  이제야 내가 정말 다른 세상에 와있구나! 실감하게 되었다. 언젠가 영화에서만 봤던 풍경이 그곳에 있었다. 비가 내려 정말 상쾌한 기분으로 거리를 걸었다. 물론 방향은 구글맵이 제대로 알려주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한국에서처럼 거리를 걸을 때 이어폰을 낄 필요도 없었다. 자동차 소리, 사람들이 말소리, 날아다니는 새의 지저귐, 이 모든 것이 나에겐 흥미로운 음악이었다. 정말 즐거운 기분이었다. 자연스럽게 내 발걸음은 가벼워만 갔다. 웬 등에 짐은 잔뜩 진 녀석이 싱글벙글 웃으며 거리를 걷는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행인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주변을 둘러보면서 편의점 위치라던가 음식점 위치를 확인하며 꾸준히 숙소로 행했다. 걸어서 10분만 걸어가면 된다. 난 길고 긴 여정 속으로 한걸음 더 깊숙이 들어섰다.

 잠깐 눈을 붙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서히 정신이 돌아왔다. 눈을 떠 보니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승객들이 내는 작은 소음마저 지워버리는 엔진 소리도, 옆에 앉아서 졸고 있는 옆자리 여성분들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고객 만족 중인 승무원들도, 비좁은 좌석과 폐쇄된 환경까지. 잠이 들기 전과 모든 것이 동일했다. 단지 내 아랫배를 콕콕 쑤시는 복통을 빼면 말이다. 난 이 느낌을 익히 알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빈번히 나를 괴롭혀오던 몹쓸 녀석. 급성 장염이다. 흔히 물갈이가 원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대체로 맞는 듯했다. 군대 훈련소에서도 얼마간 고생하지 않았던가. 아무래도 출발하기 전에 먹었던 갈비탕이 원인일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예상해서 내가 장거리 이동을 할 때 되도록 음식을 줄이려고 했던 것이다. 괜스레 그것이 한국에서 먹는 마지막 음식인 양 최후의 만찬을 즐긴 것이 고통으로 돌아온 것이다. 아직 비행기가 착륙하려면 한 시간이나 남아있다. 하지만 난 얼마 버티지 못하겠지. 그 순간 하늘이 도운 것일까? 옆좌석 사람들이 차례로 일어나 기내 화장실을 이용했고 그 틈을 이용해 나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일을 본 후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고비를 무사히 넘겼다고 안심했다. 안타깝게도 고통은 얼마 후 계속되었다.


 화장실을 한 번 더 갈까 말까 고민하는 와중에 기장의 목소리가 스피커로 울려 퍼졌다. 잠시 후 시드니 국제공항에 착륙할 예정이므로 좌석에 앉아 안전 벨트를 착용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어쩔 수 없이 공항에 내리기 전까지 참아보기로 했다. 불편한 속을 달래며 안전 벨트를 조였다. 주섬주섬 짐을 챙기는 것도 일이었다. 그래도 할 수 없다. 버텨야 한다. 두 주먹 꽉 쥐고 힘겨운 싸움을 계속해 나갔다. 비행기가 선회해서 착륙하는 그 시간이 나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졌다. 배 속에서는 용암이 세상을 향해 힘차게 요동치고 돌처럼 단단한 두 주먹은 핏기를 잃어가고 촉촉이 젖은 이마에서 김이 날 때 비행기는 활주로에 가볍게 내려섰다.



 한국에서 약 8,000km의 거리, 10시간의 비행 끝에 지구의 남반구 최대의 도시 시드니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보통 난 이런 상황에서 한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 같은 농담을 떠올렸겠지만, 불행히도 그럴 겨를이 없었다. 내 지상 목표는 단 하나. 화장실이다. 비행기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내 안의 무언가도 빠져나가기를 노력하고 있었다. 승무원의 작별 인사를 듣는 둥 마는 둥 잰걸음으로 게이트를 통과해 드디어 화장실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난 그곳에서 몸을 매우 가볍게 만들었다.


 일을 마치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화장실을 나섰다. 벌써 많은 시간이 흘러있었다. 나와 같이 내린 한국 승객들은 이미 입국심사대를 통과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온통 외국인들의 물결이었다. 아. 드디어 시작이다. 천장에 달린 Arrival 표지판을 따라 이동했다. 입국장에는 끊임없이 많은 사람이 들어오고 있었고 난 입국 신고서와 여권을 들고 인도 사람들 사이에 줄을 섰다. 입국 심사를 하는 공항 직원은 왠지 피곤해 보이는 남자였다. 이제부턴 외국식이다. 당당한 걸음으로 심사대로 다가가 직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인사했다. 그러자 그 직원은 내 여권을 보고 나에게 한국말로 '안녕하세요.' 라고 말해줬다. 역시 시드니로 한국 사람이 많이 오긴 하나보다. 특이 사항이 없으므로 순식간에 절차는 끝나고 '땡큐'라고 감사 인사를 했다. 심사대를 통과한 후 Baggage Claim으로 내 짐을 찾으러 갔다. 대충 위치를 파악하고 아래층으로 계단을 내려가던 중 공항 방송으로 내 이름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아시아나 항공 OZ601 변연우 고객님은 짐을 찾아가라.'라는 한국말이었다. 내가 화장실과 입국심사 줄을 서는데 시간을 많이 쓴 관계로 내 배낭은 케로슬(컨베이어벨트)에서 이미 회전이 끝이나 있었다. 서둘러 그 자리에 가보니 아까 봤던 아시아나항공 승무원이 내 짐을 지키고 있었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있나. 서로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고 배낭을 챙겨 들었다.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그 후로도 세관 신고 및 검역대로 가서 가방에 마약이 있는지 귀엽게 생긴 마약 탐지견이 한차례 검사를 하고 입국을 완료할 수 있었다. 마지막 문을 통과하면 다시 공항 안으로 돌아올 수 없다. 이제 온전히 호주땅이다. 그렇게 여행지에 첫발을 내디뎠다.




 호주 도착 직후 가장 먼저 해결 해야하는 메인 퀘스트는 바로 휴대폰 개통이다. 다행히도 통신사 부스를 찾아 돌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입국장의 출구를 나오니 곧바로 호주의 통신회사인 옵투스와 보다폰 부스가 보였다. 두 회사 모두 비슷한 선불폰 서비스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쪽으로 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옵투스 쪽에 한국 사람들이 보였기 때문에 나도 스리슬쩍 옵투스 부스로 이동했다. 잠시 후 멋쟁이 남자직원의 친절한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Prepaid 요금을 원한다고 말하니 여러 가격대의 상품을 소개받았다. 난 내비게이션 등으로 아이폰을 사용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4G의 제일 비싼 100달러 정액 요금 상품을 선택했다. 28일간 쓸 수 있고 데이터 5기가에 국제전화 900분 페이스북, 트위터 등 SNS 무제한의 훌륭한 요금제다. 나노유심카드는 공짜였다. 생각보다 내 입에서 영어가 쉽게 나와 나도 놀랐다. 이것은 전수관에서 같이 운동하는 미국인 그렉 덕분이다. 개통절차는 직원이 직접 해줬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 없었다. 개통이 완료되어 바이바이를 한 후 제일 먼저 집으로 전화를 걸어 무사함을 알렸다. 퀘스트 완료다.



 이제 신나게 공항 밖으로 나가보려 했으니 다시금 배에서 신호가 와서 또 다시 화장실로 들어가야 했다. 아무래도 뱃속의 모든것을 쏟아 버리지 않으면 안될 상황인 듯 했다. 장염에 좋은 약을 한국에서 가져왔기 때문에 다행이었다. 그정도는 이미 예측가능한 범위였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았다. 문제는 다른것에 있었다. 위 사진의 상점들을 지나 공항 밖으로 나왔다.







 유리문 밖으로 나와 호주의 공기를 한껏 들이켰다. 막 소나기가 내렸는지 온통 축축하고 미지근한 공기가 느껴졌다. 이제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이동해야 했다. 아이폰의 구글 맵을 열고 길 찾기를 한 결과 복잡한 길을 알려줬다. 난 구글을 믿었기 때문에 표기를 따라 계속 이동을 했다. 국내선 터미널로 이동하는 길이 표시되었지만, 이상하게도 국내선으로 가지도 못하고 지하철도 나오지 않았다. 자꾸만 외부 주차장으로 도착했다. 그렇게 난 30분째 공항 입구 근처를 맴돌고 있었다. 다리도 아프고 어깨도 아팠다. 다시 내가 밖으로 나왔던 유리문으로 돌아와 벤치에 앉아 숨을 돌렸다. 그리고 한국의 친구들에게 SOS도 보내고 인터넷으로 빠져나오는 법을 검색도 해보는 노력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다. 결국, 원인을 알아냈다. 그랬다. 지하철은 지하에 있었다. 지하의 길을 지상으로 다니고 있으니 죽어도 길이 안 나오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난 아까 그 상점 통로를 지나서 지하로 내려갔어야 했다. 해외여행에서 이 정도의 시행착오는 귀여운 축일 것이다.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 마치 이제 막 도착한 듯 행동을 하며 당황하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철로 이동했다. 시작부터 길을 잃다니……. 이거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비행기의 줄은 먼저 서나 늦게 서나 어차피 다 타야 떠난다. 느긋하게 행동해도 중간쯤에 위치할 수 있었고, 아직도 다수의 사람이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다 지친 몸을 쉬고 있었다. 한국에서 출발하는 비행기라서 그런지 역시 대부분 사람이 한국인이었다. 시드니로 가는 외국인과 한국인, 아이부터 노인까지 각자의 상념을 갖고 출발을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겨울휴가를 떠나러 어떤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겠지. 내 앞에 있던 젊은 여인이 비행기 타기 전 마지막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매우 유창한 영어로 본인의 남자친구라 생각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 '이제 출발한다.' 등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남의 사생활이니만큼 그냥 듣기평가 하는 심정으로 흘려 듣고 있다가 퍼뜩 잊고 있던 생각이 떠올랐다. 음……, 그곳에서는 영어를 써야 하는구나……. 전형적인 한국의 영어교육을 받아왔고 평균적인 영어 실력을 지니고 있던 나. 간단한 말 밖에 할 줄 모른다. 이제야 다가오는 언어의 압박. 머 설마 굶기야 하겠어? 라는 안일한 마음으로 진정시켰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비행기에서 있을 동안 여행 영어 회화책을 조금 살펴보자고 생각했다.


 게이트 입구에서 승무원들이 티켓을 확인하고 있었다. 아까 발권을 하며 받았던 보딩 패스(Boarding Pass)를 보여주면 바코드를 찍어 탑승했다는 기록을 전산으로 처리하게 된다. 잘 모르면 그냥 앞사람 하는 거 보고 따라가면 되는 단순한 시스템이다. 줄지어 조금만 이동하다 보면 비행기 입구에 들어갈 수 있다. 입구에 들어가기 전 신문이나 비행기용 이어폰 등을 챙길 수 있으나 귀찮으면 그냥 지나쳐도 상관없다. 나이키 스포츠 백을 들쳐 메고 비행기 입구로 들어섰다. 입구 바로 안쪽의 승무원에게 다시 티켓을 보여주면 친절하게 어디로 가면 된다고 안내를 해 준다. 보통 비행기의 통로는 2개로 되어 있고 좌석은 3부분으로 나뉘어 있기 때문에 미리 알아보지 않으면 귀찮아지기 마련이다. 내 위치는 38A로 창가 쪽이다. 창밖의 풍경을 감상하기 좋은 위치라 많은 사람에게 선호되곤 한다. 물론 화장실을 갈 때는 옆 사람의 동의를 얻어 나가야 하기 때문에 조금은 귀찮은 자리이기도 하다. 딱히 좌석 위의 수납공간으로 올릴만한 짐은 없었기 때문에 가방은 의자 밑에 두기로 하고 좌석에 앉았다. 얇은 베개와 담요가 준비되어 있어 요긴하게 쓸 수 있어 보였다. 조금씩 조금씩 사람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비행기의 좌석은 거의 가득 찼다. 놀랍게도 이 시간에 시드니로 향하는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많을 줄은 몰랐다. 전문용어로 '풀방'이다.


 모든 승객이 탑승한 것을 확인한 비행기는 곧 문이 닫히고 조금씩 활주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재미난 광경을 그냥 가만히 흘려보낼 수 없기에 창을 열어 확인했지만, 날은 이미 저물어 밖의 모습은 어둠과 밝은 공항건물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래도 아름답다고 소문난 인천공항의 모습은 나름 장관이었다. 그 사이 승무원들은 승객들에게 안전교육을 시행하고 있었다. 앞쪽의 모니터로 준비된 영상을 틀고 그 설명에 따른 동작을 보여 주었다. 많은 연습과 실전이 있었던 듯 매우 능숙한 움직임이다. 구명조끼 사용방법이라든지 탈출방향과 비상 착륙 시 안전한 자세 등을 교육받을 수 있었다. 얼마 전 아시아나 항공기가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불시착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인지 승무원과 승객들 모두 진지했다.


 교육이 끝나고 안전 벨트를 착용하면 활주로에서 대기 중이던 비행기는 이륙을 시작한다. 엔진의 굉음이 점차 커지고 고음역으로 바뀌어 가면 곧이어 어마어마한 가속이 내 몸을 시트로 짓누른다. 그 속도감과 진동은 마치 놀이기구를 타는 기분을 들게 한다. 속도가 한계에 다다르면 동체의 앞부분이 들리면서 공중으로 떠오른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느낌이 들면 이미 비행기의 동체는 공중으로 떠오른 상태이다. 살면서 이 정도의 가속을 느낄 기회는 흔치 않을 것이다. 그 느낌 평생 간직해도 좋다. 엔진의 배기음 소리가 날카롭게 들리고 진동이 줄어들면 이륙 성공이다. 곧이어 동체는 선회하며 방향을 잡고 그 사이 난 지상의 모습을 옆의 창으로 구경할 수 있었다. 땅을 옆에서 바라보다니 재밌는 경험이다. 검은색의 공간에 뿌리 내린 빛의 도시가 그곳에 있었다. 아름다운 빛이 흩뿌려진 모습이었다. 먼 미래 인류가 우주의 공간으로 진출을 하고 우주도시를 완성하면 볼 수 있는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혈관을 지나가는 혈액의 모습처럼 빛나는 도로 위를 달리는 움직이는 빛의 알갱이 모습도 보였다. 물론 바다엔 아무것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기수는 남쪽으로 돌려지고 지상에 있는 여러 도시를 지나치고 있었다.



 이제 이 비행기는 10시간을 꼬박 날아가야 시드니에 도착할 수 있다. 앞쪽의 모니터에는 현재 속도와 고도 위치 비행시각과 남은 시간 등이 표시되고 있었다. 매일 땅에서 올려다보던 비행기에 내가 타고 있다니 기분이 새로웠다. 안전 벨트 착용 등이 꺼지고, 길고 지루한 비행시간을 달래줄 여러 물건을 꺼내 정리하던 중 부산 상공을 날아가고 있는 표시가 모니터에 나타났다. 창을 열어보니 과연 부산일지도 모를 도시가 눈에 들어와 사진을 찍었다. 밤의 촬영은 초점을 맞추는 데 어려움이 있어 이 정도도 겨우 찍을 수 있었다. 조금 더 찍으려 했지만 이미 시야에서 멀어져 버렸다. 저 도시는 아마도 부산이겠지? 부산을 마지막으로 한국땅에 안녕을 고하고 잠시 후 비행기는 우리나라를 벗어나 일본의 영공에 들어갔다. 모니터에 대마도를 지나, 나가사키와 가고시마를 위를 날고 있다는 표시가 보였다. 다시 한 번 창을 열어 그 모습을 감상했다. 무슨 도시인지는 모르지만 마치 은하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비행기 속도로 보니 일본땅이 상당히 가깝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비행기는 계속 나아가 태평양에 들어서고 곧 까만 허공만이 보였다. 나는 창을 닫고 영어회화 책이나 호주 여행서적 등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예상보다 내부의 소리가 엔진음으로 시끄러웠기 때문에 귀를 막을 필요가 있었다. 이어폰으로 귀를 틀어막고 음악을 들으며 책으로 눈을 돌렸다. 배터리를 아껴야 했기에 아이폰이나 아이패드 사용을 자제했다. 여행책자의 시드니 볼거리에 막 빠져들 때쯤 주변이 소란스러워 이어폰을 빼고 앞을 바라보았다. 아시아나 항공이 외국인들을 위해 준비한 전통 혼례 이벤트가 진행 중이었다. 물론 진짜 결혼은 아니고 승무원이 복장을 갈아입고 통로를 돌아다니고, 화면에서는 그에 대한 설명이 나왔다. 본인들의 모습이 재밌는 듯 승무원들의 입은 시종일관 웃음꽃이 피었다. 외국인들도 물론 좋아하며 같이 사진을 찍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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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밤 잠을 편히 자지 못했기 때문에 금세 잠이 들어 버렸다. 한참을 자다 일어나보니 4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지금쯤 태평양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을 것이다. 고도 33,000피트 약 10km. 900km/h를 웃도는 빠르기로 날아온 지 8시간이 지났다. 어느덧 해가 뜨려 한다. 바깥기온은 영하 50도. 밖을 보았더니 세상이 밝아지고 구름 위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창에는 물방울이 얼어붙어 있었다. 그 추위를 짐작게 했다. 갖가지 모양의 아름다운 구름의 모습들을 감상하고 있으니 잠시 후 해가 떠올랐다. 눈이 부셔서 창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왼쪽에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니 확실히 나는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왔다.



 잠시 후 기다리던 기내식이 나왔다. 둘 중에 선택할 수 있는데 나는 당연히 서양식을 선택했다. 먹거리부터 적응해 보자는 생각에서다. 오믈렛의 맛은 밋밋했으나 푸딩과 빵이 맛있었다. 즐겁게 식사를 하고 콜라도 들이키며 영양보충을 끝냈다. 이제 몇 시간만 더 기다리면 시드니에 도착한다. 괜스레 아이팟에 토익 듣기를 재생 시켜보기도 하며 벼락치기 영어 학습에 막판 스퍼트를 올렸다.

 초겨울의 찬 공기를 가르며 공항버스는 고속도로를 나아갔다. 지난 일 년간 질리도록 다닌 도로였기에 바깥 풍경은 새로울 것이 없었으나 왜인지 특별해 보였다. 집을 나선 순간부터 여행이 시작되고 집으로 돌아와야 여행이 끝난다는 개념으로 살펴보면 나는 단순히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 아닌 긴 여정의 시작 부분을 경험하는 중이다. 아마도 난 그렇게 느끼고 있는 듯했다. 사실 외국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어릴 적 2주간 미국 플로리다에 다녀온 적이 있다. 빠듯한 살림에도 나와 형의 경험을 위해 미국으로 영어캠프를 빙자한 여행을 보내주셨다. 당시 인솔자가 영어 학원 원장이자 나이 차이 많은 사촌 누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결정이 아니었나 싶다.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좋은 경험을 허락해 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린다. 어린 나이에 겪은 경험이 얼마나 기억에 남겠는가 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디즈니랜드도 가보고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생가도 방문했다. 긴 여정을 모두 기억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지만, 처음으로 다른 나라 느낌이라는 것을 두뇌 깊숙이 각인을 시킬 수 있었다. 그 후로 가끔 한국에서도 맡을 수 있는 미국냄새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나만의 특수한 향기가 되었다. 모든 것이 즐거웠던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며 이번 여행도 많은 것을 느끼고 오리라 다짐했다.


 공항버스는 김포공항 국외선과 국내선 터미널을 경유해서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재밌게도 이때까지 내가 입국을 김포 공항 터미널로 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저 인천공항의 구조파악에 열을 올렸을 뿐이다. 고질병인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하는 버릇이 있는 나답게 바로 전날 어머니의 친구분을 배웅하러 이곳에 왔었다. 그리고 미리 어디로 가야 할지 동선을 알아두었기 때문에 우왕좌왕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긴장도 미리 그때 다했기 때문에 마 내 집에 온 듯 움직임에 막힘이 없었다. 보통 공항에서 발권은 이륙 3시간 전부터 시작을 한다. 마침 거의 시간이 맞았기 때문에 무의미하게 기다리는 시간이 길지만은 않았다.


 아시아나 항공을 이용하기 때문에 부스에 먼저 가서 줄을 섰다. 선착순으로 절차가 진행되니 먼저 가서 줄을 서는 것이 시간을 아낄 수 있는 비결이다. 잠시 기다리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앞쪽에는 투명 플라스틱으로 된 큰 박스가 있고 그 안에는 기내에 갖고 들어갈 수 없는 물품의 예시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흔히 알려졌지만, 나이프라든지 일정 용량 이상의 액체 그리고 라이터 등과 같은 인화성 물질들이 있었다. 어이없이 정말 큰 왕 라이터가 나를 웃음 짓게 했다. 저런 걸 정말 사용할 수는 있는 걸까? 어쨌든 내 차례가 돌아왔다. 집에서 프린트해온 항공권과 여권을 카운터의 직원에게 보여줬다. 직원은 가방에 위험물은 없나요? 등과 같은 통상적인 질문을 했고 여기선 당연히 없다고 대답했다. 전 세계 어딜 가던지 공통질문이고 여기서 실수하면 귀찮아진다. 기내에는 어느 정도 크기의 가방을 갖고 탈 수 있기 때문에 내 배낭만 화물칸으로 보냈다. 항공사나 항공권마다 다르긴 하지만 보통 화물의 무게는 20kg 이하까지 추가비용 없이 보낼 수 있고 그 이상이면 추가비용을 물어야 한다. 내 배낭은 모두 합해봤자 18kg으로 기준 아래였다. 화물의 무게는 공항 어딘가 존재하는 저울로 미리 재볼 수가 있으니 짐의 분배를 잘해낸다면 추가 비용을 아낄 수 있다.



 위의 절차가 끝나면 이와 같은 탑승권(Boarding Pass)을 받을 수 있다. 간단히 탑승 시간과 탑승 게이트, 구역이 표시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만 잘 알아 둔다면 대부분의 경우 문제없이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다. 하지만 공항의 사정상 게이트가 변경되거나 연착이 되는 경우도 생기기 때문에 표시를 맹신해서는 안 된다. 공항에서는 항상 안내방송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가르침은 훗날 시드니에서 멜버른으로 향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아!, 예정 변경 대명사 제트스타여. 탑승권을 받았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니다. 아직 출국검사장이란 관문이 남아있다. 단지 그곳을 통과하면 한국이 아니게 되기 때문에 다시 밖으로 나오기가 힘들어진다. 만약 배웅나온 가족이나 친구 혹은 연인이 있다면 안녕 인사는 이 전에 끝내는 것이 좋다. 출국검사는 몰리는 사람에 따라서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기 때문에 최소한 탑승시간 한 시간 전에는 입장하는 것이 좋다. 


 집에서 아무것도 먹고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공항 3층 식당가로 향했다. 과연 비쌌지만 어쩔 수 없다. 한국 떠나기 전 마지막 식사이기 때문에 조금 비싸도 상관없는 기분이었다. 갈비탕을 맛있게 먹었는데, 이후에 고생 좀 했다. 마지막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어머니를 배웅하기 위해 공항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다. 이미 어둑어둑해진 공항은 바람이 많이 불고 있었다. 만남과 이별이 교차하는 공항 터미널에서 나홀로 생존이 시작되었다.


 손 흔들어 마지막 인사를 나눈 난 서둘러 공항으로 돌아왔다. 출국장 역시 먼저 들어가면 먼저 나오는 구조이기 때문에 미리 가는 것이 유리하다. 공항에서 사람들의 움직임을 잘 관찰해보면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있다. 물론 공항 곳곳에 표지판이나 안내서가 있기 때문에 공항 이용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출국장의 풍경은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아마도 테러의 위협을 방지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된다. 줄을 서 기다리며 간단한 출국카드를 작성한다. 미리 검은색 볼펜을 준비해두는 것이 좋다. 간단한 절차들을 통과하며 마지막으로 소지한 짐에 방사능을 끼얹으면 출입국장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곳은 그 유명한 면세점이 있다. 면세점이라고 싸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기본값이 비싼 것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결코 싸게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주변을 둘러보자 통신사 부스가 나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아갔다. 무제한 로밍을 신청하기 위해서다. 만약 호주에서 첫날 스마트폰 개통에 실패할 경우를 대비한 차선책이다. 변수가 많은 여행은 항상 차선책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루에 만 원이라는 비싼 요금이지만 사용만 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일단 신청을 했다. 이제 해외 자동 로밍으로 무제한 데이터를 이용할 수 있다. 물론 통화요금은 별도다. 신청을 끝낸 후 주변을 조금 구경하다가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제 떠난다는 인사를 나눴다. 입으로는 잘 다녀오겠다, 걱정하지 마라, 떠들고 있지만 이미 머릿속은 혼란의 연속이다. 수많은 사람이 내 주변을 스쳐 지나갔고 난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간혹가다 일부 사람들이 면세점 구경에 정신 팔린 나머지 본인 비행기의 탑승시각을 놓치는 일이 발생하곤 한다. 예정된 시간이 지나도 탑승하지 않은 승객이 있으면 항공사에서는 방송으로 그 사람을 호출하고 여러 직원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손님을 찾는다. 공항에서 손님을 찾는 방송은 흔하게 들을 수 있다. 단지 발음상의 차이 때문에 그 사람 이름을 본인도 잘 듣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방송을 주의 깊게 잘 들어야 한다. 위와 같은 사건 방지를 위해 탑승시각과 이륙시각에는 30분 정도의 간격이 존재한다. 만약 이륙시각을 벗어나 버리게 되면 비행기는 그 손님 짐을 꺼내 공항으로 돌려보내고 먼저 출발해 버린다. 간혹 짐을 안 꺼내고 출발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경우 주인은 놔두고 짐 홀로 여행을 떠나는 꼴이 된다. 비행기를 놓치고 울고불고 난리 쳐봐야 날아간 비행기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일등석 손님의 경우는 꽤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려 준다고 한다. 장거리 운행의 경우 30분 정도 늦게 출발해도 속력을 더 내서 예정시간에 도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일등석의 위력이다.



 출발시각이 다가오자 탑승 게이트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멀었지만, 무빙워크가 있어서 힘들이지 않고 이동할 수 있었다. 내 앞에는 친구로 보이는 두 외국인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앞으로 몇 시간 후면 내가 외국인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생각보다 멀리 떨어져 있었다. 중간중간에 화장실이 있었기 때문에 잠시 들려 긴장을 흘려보내기도 했다.





 39번 게이트에 도착하니 유리 외벽 너머로 공항 활주로가 펼쳐져 있었다. 비록 어두워서 멀리까지 보이진 못했지만 가까운 부분에는 내가 타고 갈 OZ601 비행기가 밝은 조명 아래서 탑승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공항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비행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이곳에선 별달리 할 일이 없으므로 탑승객 대부분이 멍하니 앉아있거나 동료와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고 아이들은 넓은 공간에 신이 나던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함의 연속이다. 공항 와이파이 신호를 잡아 인터넷을 보거나 그것도 지루해지 가만히 앉아 여러 가지 잡념을 떠올렸다. 비행기의 안전 걱정부터 어릴 적 보았던 구름 위의 모습을 떠올려보기도 하고 비행기의 가속을 얼른 느껴보고 싶어 두근거리기도 했다. 지루했던 시간이 끝나고 탑승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줄을 맞춰 섰고 나 역시 그 대열에 동참했다. 재미있게도 같은 시간에 다른 2대의 비행기도 같은 장소로 떠난다. 태평양 건너 남반구로 옹기종기 모여서 날아가는 비행기 편대라니 상상만 해도 귀여웠다.




 누군가 나에게 '배낭여행을 가려고 하면 뭐가 필요할까요?' 라고 물어본다면 아주 간단히 대답해줄 수 있다. 그거야 '배낭부터 챙기세요.' 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하다. 배낭여행에서 배낭은 빠질 수 없는 로망이다. '배낭 없는 배낭여행은 말 없는 마차와 같다.' 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던 난 케리어가 편리하다고 말하는 주변 사람들의 의견을 일축했다. 등과 어깨로 전해지는 무게감은 정말 여행을 다니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손으로 질질 끌고 다니는 짐가방에 비할 바가 아니다.


 배낭은 여행지에서 오랜시간 함께할 파트너와 같다. 배낭을 선택함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디자인은 물론이고 적절한 내구성과 사용의 편리함, 그리고 어깨와 등 위에서 무게를 어떻게 분산해줄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일단 겉에 주머니가 많은 제품은 편리해 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디자인은 여행지에 따라서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다. 윤리의식이 낮고 사람이 북적이는 관광지의 경우 소매치기가 활개를 친다. 귀중품을 보조 주머니에 넣어 놨다가는 귀신도 모르게 털리곤 한다. 일단 주머니가 난잡하게 달린 모델은 제외하기로 했다. 겉으로 보기에 심플하고 튼튼하면서도 내가 원할 때 입구를 열지 않고도 가방 제일 밑바닥에 있는 물건도 꺼낼 수 있는 제품이 필요했다. 배낭을 고르는데 이틀을 소모했다. 다행히 내가 원하는 제품을 찾을 수 있었다. 아웃도어 메이커에서 잘나가는 콜롬비아 신상품. 용량은 적지도 많지도 않은 45리터 제품이다.


 배낭 하나만으로는 여러 가지로 힘들었기 때문에 스포츠 백과 작은 손가방을 더 챙겼다.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손가방은 숙소에 짐을 놔두고 돌아다닐 때 사용하는 것이고 스포츠 백은 여러 기념품을 수납하기에 좋았다. 애초에 딱 맞춰서 짐을 챙겼기 때문에 기념품을 사면 집어넣을 자리가 없는 것이 당연했다.  후에 공항에서 배낭의 무게를 재보니 짐 무게는 18kg 이상이었다. 뭐 군장보다 가벼운 수준이지만 체력이 없으면 소화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호주는 남반구에 위치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와는 계절이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가 겨울이면 그곳은 여름인 셈이다. 시차는 그리 크지 않다. 시드니의 시간대는 한국 시각보다 2시간 빠른 정도이다. 시차 적응에는 큰 문제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여름옷을 여러 벌 챙겨가야 함은 물론이고 훗날 일정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기 때문에 겨울옷 또한 조금 챙겨야 했다. 그러다 보니 가방의 부피가 커지는 것은 당연했다. 최대한 정리정돈 해서 배낭을 꾸려야 했다. 가장 드물게 쓸 겨울옷과 바람막이는 가방 제일 밑으로 넣고 중간에는 깨지면 안 되는 여러 가지 무거운 것들이 들어갔다. 짐 챙기기 전에 미리 다이소를 돌며 여러 클리어 팩을 사왔기 때문에 옷가지의 종류끼리 분류해서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그 외에 챙길 것들은 여행안내서, 간단한 여행회화 책, 구급 약품, 선크림, 화장지와 물티슈, 수영복, 잠옷 수첩 필기구 등이었다. 여권사본과 대사관 연락처가 적혀있는 종이, 돈다발 등은 여러 곳에 분산시켜 놓아 분실에 대비했다. 혼자 여행하기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에 대해 염두에 두어야 했다. 안전여행을 위한 준비는 모자라게 해서는 안 된다. 호신을 위해 항상 가지고 다니는 접이식 나이프를 가져갈까 하다가 공항경찰이 무서워 그만두었다.


 주사위는 던져졌고 무르지 못한다. 마음속으로는 살짝 긴장하고 있었지만, 겉으로 태연하게 행동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감 초조 흥분 등 여러 가지 감정들이 머릿속을 휘돌았다. 최후의 만찬을 즐기듯 친구들을 만나 치킨을 뜯었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밤은 잠을 이룰 수가 없어 밤새도록 침대 위에서 뒤척여야 했다. 준비는 끝났다.


 흘러가는 시간은 잡을 수 없고 결국 날이 밝았다. 나는 밥을 먹을 수 없었다. 혹시 모를 생리현상을 조절하기 위해 먹는 음식을 제한해야 했다. 장거리 여행에서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

 


 원주 터미널에서 인천공항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에 탑승했다. 공항으로 가는 길은 어머니께서 동행해 주셨다. 앞으로 몇 시간 후면 난 낯선 세상에 홀로 던져지게 된다. 모험이 시작된다.

 일단 지르고 보는 무계획 여행의 장점이라면 여행 일정에 쫓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통 패키지 단기여행의 형태를 살펴본다면 이건 여행이 아니라 인증샷을 위한 강행군으로 보인다. 차를 타고 장시간 이동하며 목적지에 다다르면 내려서 사진 한번 찍고 잠깐 둘러본 후에, 또다시 이동을 시작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많은 것을 보고 온 듯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스스로 여행일정을 치밀하게 계획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의 결과가 나올 수 있다. 더 많은 것을 보기 위해 세밀하게 일정을 잡고 그것에 집중하다 보니 시야가 좁아지게 되어, 오히려 보지 못하는 것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나는 그저 행동에 제약을 주지 않고 거리를 자유롭게 걸으면서 이것도 보고 저것도 살펴볼 수 있는 그러한 자유 여행을 원했다. 여유로워진다면 생각할 시간도 많아지므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물론 무계획 여행의 단점도 존재한다. 모든 것을 실시간으로 결정해야 하므로 효과적으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하며 또한 이동수단이나 방을 불과 며칠 전, 심하면 바로 전날 예약을 해야 할 경우도 생겨 여행 비용이 많이 소모된다. 예약은 미리 잡을수록 가격이 내려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짧게 잡은 계획이 틀어지게 되면 미련없이 방향을 틀 수 있는 차선책이 필요하다. 차선책이 없다면 아까운 시간과 비용을 소모할 수 있고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호주에서 정보를 얻기 위한 해결책은 간단했다. 우리는 손안의 인터넷 세상을 살고 있지 않은가. 정답은 스마트폰이다. 호주의 휴대전화 통신망은 우리나라 기기와도 호환이 잘 되었고 비싼 로밍의 방법보다는 현지에서 선불 요금 단말을 개통할 수 있다. 과연 여행자가 많은 국가답다.

 

 사실 나는 이전까지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냥 문자와 통화만을 위한 피처폰이 있었을 뿐이다. 정보통신학과를 졸업하고도 정보 세계의 갈라파고스를 자처한다고 비웃을 수 있겠지만 그래서 더욱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평소에 길거리를 걸어가면서 인터넷을 할 필요성이 얼마나 있을까? 앞서 말한 그 트라우마 덕분에 난 그동안 목적 없이 움직이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사전에 모든 정보를 알아보고 지도가 필요하면 아이패드에 저장해서 보고 다녔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이러한 일상과는 거리가 먼일임이 분명했다.

 

 여행지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을 사진으로 남겨야 하는 로망이 있다. 그리고 실시간으로 인터넷과 통화가 가능한 단말기 역시 반드시 필요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예전부터 점찍어둔 기기가 있었다. 바로 iPhone 5S. 이번 모델에서는 사진 기능과 품질이 크게 향상이 되었다고 들었기 때문에 금상첨화였다. 여행 며칠 전에 애플 판매점에 달려가서 컨트리락이 없는 제품을 구매했다. 해외에서 개통하기 위해서는 컨트리락이 없어야 한다. 일명 통신사 프리 제품이다. 약간 비싼 감이 들었지만,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저함이 없었다.

 

 

기존에 사용하던 폰은 3G망을 사용하며 USIM 카드도 기본형이었고 새로 산 iPhone 5S는 나노심을 사용했기 때문에 호환이 되지 않았다. 아이폰에 여러 가지 여행에 필요한 어플리케이션을 깔기 위해서는 반드시 개통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곧바로 근처의 직영점으로 달려가서 나노심을 사고 기존 USIM의 계정 정보를 옮겨달라고 했다. 올래 직원은 아이폰은 원래 LTE로 새로 개통을 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말했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사실 iPhone 5S는 3G 망을 이용해 개통할 수 있다.

 

 무계획 여행에서 가장 유용한 물건은 바로 스마트폰이라고 생각한다. 사진찍기, 비행편과 숙소 예약부터 길 찾기, 관광지 정보확인, 간단한 통역과 가족들에게 생존신고 등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다. 스마트폰이 있고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다면 난 혼자지만 혼자가 아니다.

 

 

 그다음 할 일은 호주에서 사용할 돈을 구하는 것이다. 다행히 원주에 있는 우리은행에서 내가 필요한 금액만큼의 호주 달러가 있었기 때문에 간편하게 환전할 수 있었다. 공항에서도 환전 서비스를 하고 있으나 수수료를 많이 가져가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환전은 미리 은행에서 하는 것이 좋다. 환전하면서 가지고 있는 우리은행 체크카드도 외국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간단한 절차를 거쳐서 등록했다. VISA를 지원하는 카드이기 때문에 가맹점 어디를 가든지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 정도만 준비해도 호주에서 굶어 죽지 않는다. 환전을 하면서 여직원과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직원은 나를 많이 부러워했다. 사실 나는 여직원이 더 부러웠다. 일단 2,500달러 정도 환전을 했고 모자라면 현지의 ATM에서 뽑아 쓰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 호주 돈은 기본 재료가 플라스틱이기 때문에 잘 구겨지지 않고, 찢어지지도 물에 젖지도 않는다. 지폐별로 다른 색들이 구분을 간편하게 해주었다. 여러 가지 첨단 위조방지 기법이 들어가 있기도 하다. 호주 달러의 알록달록한 색이 참 예뻐서 마음에 들었다. 쓰기가 아까울 정도였다.

 패기 있게 회사를 그만둘 결정을 하는 데까지는 좋았지만, 인생은 언제나 계획대로 되지는 않는 법이었다. 생각보다 퇴직은 빨리 다가왔다. 내가 호주로 워킹을 가고 싶다고 말한 지 일주일 만에 괘씸죄로 잘려버렸다. 모든 것이 엉성한 회사. 사장의 말이 곧 법이었다. 그래, 고용계약서도 써본 적 없이 다닌 벤처 기업 더는 미련 없다. 어떤 직원은 나보고 '사장님께 가서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빌어라.' 그런 말까지 했다. 내가 뭘 그리 잘못을 했을까? 난 그냥 그동안 내가 일한 정당한 대가를 받고 일을 했으며 더는 내 일이 발전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만두는 것이다. 어차피 전공과 비슷한 일도 아니었다. 회사에서 내가 하는 일은 대졸자가 아니라 고등학생이 해도 충분한 그런 일이었다. 자존심 버려가며 몇 개월 더 일하는 것보다는 내 자존감이 나에게 더 소중했다. 기왕 일찍 그만두는 김에 그동안 하고 싶었던 것을 실컷 해보자고 생각했다.


 겨우내 몸을 움츠리게 만들었던 찬 바람이 물러가고, 따스한 햇볕과 상쾌한 풀 내음이 기분을 좋게 만드는 봄의 어느 날 나는 짐을 챙겨 집으로 내려왔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이제 남은 시간, 온전히 나를 위해 사용할 수 있다. 나는 평일에도 만족할 만큼 늘어지게 잘 수도 있었고 그렇게 하고 싶었던 택견도 다시 시작했다. 불어난 몸무게로 인해서 움직임이 예전과 같지는 않지만, 비 오듯 쏟아지는 땀 한 방울 한 방울은 결코 내 노력을 배신하지 않는다. 빠르진 않지만 조금씩 예전의 실력이 돌아오고 있었다. 지난 일 년간 세워둔 내 자전거도 다시 타고 싶었다. 고장 난 안장도 고치고 타이어의 튜브도 교체했다. 매일 매일 전수관과 집을 오가는 데 사용했다. 내리막길에서 중력을 받아 속도를 올리면 공기의 저항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하늘을 나는 기분이다. 나를 스쳐 지나가는 공기의 흐름에 그동안 받았던 스트레스도 같이 흘려보냈다.


 호주 워킹 홀리데이에 대해서 여러 가지 검색을 하면서 알아보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예전만 못하다고 말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워킹중인 한국 사람들이 폭행이나 강도를 당하거나 배우고 싶은 영어 실력은 늘지 않고 사는 데 급급해 노예처럼 일만 하다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노예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일을 그만두었는데 그곳에 가서 또다시 노예생활을 할 수는 없었다. 그야말로 글로벌 호구 아닌가. 워킹 홀리데이 생각을 접고 여행을 가야겠다고 계획을 수정했다. 그러다보니 일찍 출발할 필요가 없어져 버렸다. 나는 당분간 평소의 생활에 충실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시간은 정말 빨리 흘러갔다. 그동안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한 고등학교 택견 동아리 활동에 조교로 참여하여 지방 방송에도 잠깐 나올 수 있었다. 무더운 여름날 농구를 하다가 전방십자인대 파열의 부상을 당한 형의 간호를 위해 강원대학병원에서 일주일 넘게 생활도 해봤다. 시원한 에어컨 때문에 감기에 걸릴 지경이었다. 덕분에 올여름 우리가족 피서는 물 건너 갔다. 서점에서 읽고 싶은 책도 마구마구 사버렸다. 개인적으로 두꺼운 책을 좋아해서 내 책장의 공간은 갈수록 줄어만 갔다. 아쉽게도 독서보다는 다른 것에 집중하다 보니 사버린 책의 양에 비해서 읽은 책은 얼마 되지 않는다. 지금도 열심히 읽고 있는 중이다. 지겨웠던 여름 장마도 지나고 슬며시 다가온 가을도 깊어만 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10월이 되어 있었다. 신선놀음에 빠져 있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6개월 정도는 정말 순식간이었다. 이대로 올해를 다 보낼 판이었다. 이대로 출발하지 못할까 걱정이 되었다. 이제 어디 가서 맞아 죽지 않을 정도로 체력과 전투력도 올렸다. 이제 정말 출발해야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일단 기존에 있던 구형여권을 전자여권으로 갱신했다. 전자여권이 여러모로 편리하단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군 전역 후 해외여행에 가보려고 만든 구형 전자여권은 한 번도 사용해보지 못하고 그렇게 불쌍하게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여권을 만들었으니 호주 이민성 홈페이지에 들어가 전자비자를 신청했다. 돈만 내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편리했다. 전자여권의 위력이 이런 곳에서 나왔다. 비자까지 발급받고 나서야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로 여행을 떠나는구나.



 비행기 표를 급하게 알아보기 시작했다. 사실 비행기 표는 일찍 예약할수록 가격이 좋기 때문에 알뜰하게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들은 수개월 앞서서 예약을 한다. 나처럼 몇 주를 앞두고 임박해서 구입을 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고 결국 표를 구한다 해도 가격은 상당히 올라기 마련이다. 호주에 가본 적 있는 사촌 동생이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도움을 주었다. 인터파크에 있는 직항 왕복항공편을 알아보고 약 120만원 정도에 표를 구입할 수 있었다.


 출발 일자는 2013년 11월 22일 도착 일자는 12월 23일로 정했다. 크리스마스는 한국에서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시드니의 여름 크리스마스는 정말로 큰 축제라고 했다. 뒤늦게 호주에서 그것을 알고 출국 비행기를 늦추려 했으나 자리가 없어서 불가능했다. 훗날 이 일은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인 숙소를 찾는 일은 친구의 도움이 컸다. 여행을 좋아하는 꽁양의 노하우는 거의 내 구세주나 마찬가지였다. hostels.com의 홈페이지를 이용하여 시드니 버우드 지역의 Sydney Student Living이라 하는 여행자 숙소를 정했다. 23일 체크인 28일 체크아웃. 하루에 약 6만원이고 2인실을 혼자 예약했다. 약간 비싼 감이 있지만 원래 여행은 약간 럭셔리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았다.


 시드니에 대해서는 정말 오페라 하우스밖에 몰랐던 난 서점으로 달려가 호주여행 책자를 여러 권 샀다. 그리고 안 읽었다. 앞서 설명한 바 있는 내 불안증에 도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계획만 세워서는 실천할 수 없으니 일단 적당히 저지르고 지켜봐야,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혼돈의 이 세상에 계획대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이미 수개월 전에 체험했기 때문이다. 책자는 호주에 도착하고 나서 이용할 것이다.


 만약 테마를 정해야 한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무계획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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